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오 12세 (문단 편집) == 주교 및 추기경 시절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bc2eca70394a80981ef0d126bb5c7d3.jpg]] 전임 교황 시절부터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한 뛰어난 인재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연간에 각국 군주들과 교황권에 대한 논의를 했던 것이 주요 업적이다. 후술할 신경증 증상도 사실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협상국]]과 [[동맹국]] 간의 중재를 위해서 갈 때는, 전쟁 중에 배급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라서 기차에 따로 음식을 실어날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비오 12세는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는데, 한 예로 [[뮌헨]]에서 머물 때는 [[쿠르트 아이스너]]의 혁명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들이 총칼을 들고 주교 관저로 쳐들어와 코앞에서 무기를 들이미는 상황까지 겪었다. 이때 각국의 [[외교관]]들도 [[뮌헨]]을 빠져나가는 개판난전의 상황이었지만, 비오 12세는 끝까지 뮌헨의 주교 관저를 벗어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훗날 [[나치]]의 위협에도 [[바티칸]]을 지킨 배짱이 그냥 나온 게 아닌 셈이다. 또한 1904년에는 3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미 [[몬시뇰]] 칭호를 받았는데, 이 칭호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하면 그의 능력과 위치를 어느 정도로 인정받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비오 12세는 성직자가 되기 전부터 비범한 출신 배경을 가졌다. 비오 12세는 전통적으로 교황을 지지한 귀족 가문인 '[[검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할아버지인 마르칸토니오 파첼리는 교황청 재정부 차관보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인 필리포 파첼리는 바티칸의 항소 법원인 '로마 로타'의 대표였다. 또 비오 12세의 숙부인 프란체스코 파첼리는 비오 11세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라테라노 조약]]을 이끌어냈다. [[뮌헨]]에서 머물 때 [[히틀러]]와도 만난 적이 있는데, 비오 12세는 히틀러에게 무도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라며 축복을 내렸다. 이때는 1918년으로, 히틀러가 나치당에 가입하기 전에 잠깐 만난 정도로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꿰뚫어 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히틀러의 위험성을 꿰뚫어 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나 [[찰리 채플린]] 등의 인물들도 히틀러가 나치당을 장악하고 슬슬 똘기를 드러내기 시작한 다음에야 눈치를 챘다. 이후 비오 12세 본인도 나중엔 뭔가를 깨달았는지 1935년 루르드에서 나치에 대한 선언문이 나오기도 했다. 아래는 그 선언에 대한 일부다. > '''반짝이는 새 장신구로 옛 과오를 덮은 불쌍한 사기꾼들이 있다. 그들이 사회 개혁의 기치 아래 모인 것이어도, 세상과 인생의 잘못된 가치관에 따른 것이어도, 혹은 인종이나 혈통에 관한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힌 것이어도, 모두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히틀러와는 관계없이, [[독일 공산당]]의 뮌헨 지부를 가리켜 무질서하고 추잡하며, 유대인 천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치 독일]] 및 [[크로아티아]]와의 회담 때문에 후일 논란이 되기도 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바티칸 시국간의 권력 분배에 대한 확실한 처리가 파첼리의 주요 업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